고대에서 중세에 이르는 시기에 동서양에서는 혜성에 대한 여러 연구가 있었다. 옛날 사람들은 하늘은 완벽한 세계라고 믿었지만 이런 생각을 깨뜨린 것이 혜성이었다. 갑자기 하늘에 나타난 혜성은 우주의 질서를 깨뜨리는 공포스러운 존재였다. 대표적으로 핼리 혜성으로 로마시대 때 많이 등장했는데 로마인들은 혜성은 불행을 예고한다고 생각했다. 로마의 정치인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암살됐을 때 붉은 혜성을 목격했으며, 사람들은 이 혜성이 율리우스가 신으로 변해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라 믿었다. 불길함을 암시한다는 믿음 때문에 로마의 황제 네로는 혜성이 나타날 때마다 주변의 신하를 죽였다.
대한민국에도 불행을 암시한 혜성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다. 신라시대에는 왕의 죽음이나 중요한 사건이 일어났을 때 혜성이 등장하는데, 장보고가 염장에게 암살 당했을 때 혜성이 나타났다고 전해진다.
조선시대에 나타난 혜성도 불길한 조짐으로 해석했다. 혜성이 나타날 때마다 왕은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는데 역모나 반역의 징조로 해석했기 때문이다. 조선 개국 후 처음 나타난 핼리혜성은 1456년 23일 동안 관측되었는데 며칠 후 의정부 우찬성인 정찬손과 김질이 세조에게 알렸고, 사육신의 단종 복위 계획이 밝혀졌다. 핼리혜성은 당시 민감한 정치 사안인 단종 복위 사건을 암시했다고 여겨진 것이다. 핼리혜성은 왕과 왕실의 죽음을 예견하기도 했다. 1607년 병석에 누운 선조는 그해 여름 핼리혜성이 나타났다는 보고를 받고 6개월 뒤 죽게 된다.
그러나 세계적으로 혜성에 대한 불안이 고조되던 것에 반대되는 의견을 제시한 사람이 있었다. 17세 폴란드의 귀족 루베이넹츠키는 415회 나타난 혜성과 사건들의 관계를 조사했다. 그래서 좋은 일과 나쁜 일이 거의 고르게 나타난다는 사실을 밝혀내고 역사적 재앙과 혜성의 출현은 서로 연관성이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그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혜성에 대한 불안감은 막을 수 없었다.
이처럼 불길한 징조로 여겨지던 혜성은 18세기에 들어서 실체가 밝혀지기 시작했다. 천문학자였던 에드먼드 핼리는 혜성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했는데, 그의 친구인 아이작 뉴턴이 새로운 주장을 했기 때문이다. 뉴턴은 1680년 10월과 11월에 관측된 혜성이 태양 뒤로 사라졌다가 12월에 나타나자 두 혜성이 같은 것이며, 태양을 중심으로 궤도를 그리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 이야기를 들은 핼리는 1705년 24개 혜성의 궤도를 계산하여 1531년과 1607년, 1682년에 나타난 세 개의 혜성이 같은 혜성임을 밝혀냈다. 그리고 1758년에 이 혜성이 다시 나타날 것을 예측했다. 즉 이 혜성이 75~76년을 주기로 지구에 접근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핼리의 예측대로 1758년 긴 꼬리를 드리운 혜성이 밤하늘에 나타났다. 이로써 갑자기 나타났다 사라지는 혜성이 주기가 있다는 것이 밝혀졌고, 이 혜성은 그의 이름 따서 핼리 혜성이라 이름 붙이게 됐다. 이후 다양한 연구를 통해 혜성은 주기적으로 지구를 지나간다는 것과 태양 주위를 공전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동아시아의 혜성 연구
동아시아에서 혜성은 달의 정기가 모여 만들어졌다고 여겼다. 천체의 출현은 길흉의 판단으로 이어졌는데, 혜성은 주로 가난의 경고로 받아들여졌다. "천문류초"에 의하면 혜성은 요성(妖星)의 대표적인 종류로 분류했다. 하지만 대체로 요성과 혜성, 객성 등의 종류를 구분하지 않고 혜성의 명칭으로 사용하였다. 요성은 오행의 정기에 따라 다섯 가지가 있다고 했다. 천문류초에서는 혜성을 포함하여 21가지 종류의 요성을 분류하고 있고, 혜성은 오래된 것을 제거하고 새것을 펴는 의미에서 빗자루를 가리키는 소성(掃星)의 별칭이 있다.
중국의 혜성 연구는 기원전 2세기의 것으로 추측되는 마왕퇴 무덤에서 혜성의 여러 형태와 명칭을 기록한 백서가 발굴되었다.
한국의 혜성 연구는 기록된 역사의 초기부터 혜성의 관측 기록이 있는데, 현존하는 최초의 기록은 삼국사기의 신라본기, 박혁거세 9년(기원전 49년) 3월의 기록이다. 신라 진평왕 대에 혜성이 나타나자 이변이 사라질 것을 기원하며 신라의 승려인 융천가가 "혜성가"라는 향가를 지어 읊은 기록이 있다. 이후 삼국사기, 고려사, 조선왕조실록, 서운관의 각종 문서에 여러 혜성들이 관측되고 기록 되었는데, 혜성의 위치와 크기, 형태, 꼬리의 길이와 방향이 기록되었다.
서양의 혜성연구
중세 이전은 아리스토텔레스가 그의 저서인 기상학(Meteorology)에서 혜성이 황도를 벗어난 위치에 나타나는 것을 근거로 혜성은 행성과 다른 것이며, 유성이나 오로라, 은하수와 함께 상층 대기의 현상이라 주장하였다. 이 주장이 2천 년 동안 서양의 혜성 이론을 대표하였다.
근세 이후의 혜성 연구는 16세기 말에 티코 브라헤가 시차를 이용하여 혜성이 달보다 멀리 있음을 밝혀냈고, 18세기 초 에드먼드 핼리는 관측된 기록을 토대로 최초로 혜성의 주기를 계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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